우리 집은 말 수가 적다.
경상도 집안이라 그런 건지, 그냥 집안 내력이 그런 건지 속에 있는 이야기를 원체하지 않는다. 대화를 하는 것도 밥 먹을 때나 차 안에서, 그것도 몇 마디 안 나누는 무미건조한 집이다. 내가 말 수가 적다는 건 성인이 되고 여러 사람들과 집에 대한 이야기를 하면서 알게됐다. 오늘 오전에는 어떤 기분이었고 점심은 무얼 먹었는 지, 오후에는 어땠는 지 가족들과 이야기를 하는 게 당연한 지금 여자친구는 우리 집 이야기를 듣고는 경악을 하곤 한다.
누군가에게 이야기한 적이 별로 없어서 많이들 모르지만, 나는 이혼 가정에서 자랐다.
초등학교 고학년 이후로 아버지는 사업을 핑계로 외박이 잦아지셨고 어린 나는 사업이 많이 바빠져서 그렇구나라고 생각했지만 사실은 아니었다. 아버지는 혼외자식과 가정이 있었고, 아버지의 외도로 위태로워진 가정을 어머니는 혼자서 지키려고 부둥켜 안고 계셨다.
한 동안 그래서 나는 가족들이 많이 답답했다. 아무렇지 않은 척 혼자 애쓰는 어머니, 남자가 그럴 수도 있다면서 합리화하면서 너희가 다 이해 해야한다는 할머니, 본인 때문에 얼마나 집이 불행해지고 있는 지도 모르고 그저 아버지 대접만 바라는 철없는 아버지, 그리고 그 사이에 낀 장남인 나는 본가에만 내려가면 숨이 턱 막히고 피하려고만 했다.
유학을 할 동안은 에라 모르겠다며 그냥 한국을 떠나 버릴 수 있었다. 학업이나 입시로 부터 도피가 아닌, 우리 가정의 불화로 부터 도피 유학이었다. 학기 중에는 바빠서 그냥 집안 사정을 잠시나마 잊을 수 있었다. 집에 한 달에 한 번 통화 안한 적도 있다. 지금 생각하면 정말 쓰레기 같다. 1년에 1억 가까운 돈을 부담시켜드리고 정작 아들은 집이 싫어 연락도 안했네.
군대 때문에 한국에 들어와서 그나마 가족들이랑 더 자주 보게 되었다. 휴가 때마다라도 집에 들어갔으니. 그 2년 동안도 크게 뭔가 진전이 있지는 않았다. 어머니는 아버지가 다른 집을 정리하고 돌아오시길 계속 바랐고, 아버지는 그럴 마음이 없었다. 나는 그런 상황을 알고도 모른척 하려 애써 집을 바쁜체하며 나섰다.
전역 후 취업을 하고 이십 대 후반이 되면서, 나는 피하려고만 하는 나를 바꾸고 싶었다. 어머니가 나와 동생들에게 그랬던 것 처럼, 내가 집을 나서면서 안쓰럽게 희어가는 어머니의 머리카락을 보며 그랬던 것 처럼 언제까지나 불편한 진실들을 덮어두며 살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한 달에 한 번쯤 하던 어머니께 연락을 매주 일요일마다 해봤다. 처음에는 할 말이 없어서 1분도 안하던 대화가 매주 전화를 하니 5분, 10분, 어쩔때는 40분을 넘기기도 했다.
십수년의 세월동안 혼자서 다 떠안으려고 했던 어머니는 작년부터 조금씩 내게 털어놓기 시작하셨는데, 올해가 되고 서야 어머니가 큰 결정들을 하시기 시작했다. 먼저 어머니는 아버지랑 관계를 정리하기로 결심하셨다. 오랫동안 어머니는 아버지가 다른 집을 정리하고 다시 돌아오시길 기다리셨지만 아버지는 끝내 그 어느 것도 포기할 정도로 용기 있지 않았고, 어머니는 끝끝내 결단을 내리셨다.
아직 정리해야할 것들 투성이다. 어렸을 때부터 나를 키워주셨던 할머니와 엄마와의 관계, 그 사이에서 아직 고등학교를 마쳐야하는 막내 동생과 아버지 일을 도와주던 둘째 동생과 아버지의 계약 문제. 하지만 그 모든 생각만 해도 머리가 지끈해지는 것들이 무색할 만큼 얼어있던 화목한 가정으로서의 모습이 조금씩 진전의 실마리가 보여서 희망적이다.
나는 돈을 엄청 많이 벌어서 부귀영화를 누리고 살거나, 엄청난 명예를 얻는 것 보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과 실없지만 따뜻하고 안정적인 가정을 꾸리는 게 꿈이다. 내가 겪었던 불화를 대물림하지 않도록 더 단단하고 다정한 그러면서도 결단력 있는 사람이 될 수 있도록 노력해야지.